이준희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사치앤사치 같은 경우 아예 순수미술에 뛰어들어 yBa(Young British Artists) 같은 그룹을 키워내는 것을 보면 순수미술이 얼마나 광고와 밀접해 있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지다
미국에서 매년 오스카상을 주는 단체인 영화아카데미의 정식 명칭은?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과학을 이용해 움직이는 그림 예술을 연구하는 학회'라는 뜻이 된다. 영화는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의미와 형태로 발전했지만, 적어도 영화가 처음 시작될 당시에는 새로이 나타난 이 매체를 '필름이라는 과학을 이용해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고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본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해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사실 프랑스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라는 매체를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 구조가 있기보다는 당시 길거리의 풍경들을 스케치해 필름에 담는 정도였다.
서양이 영화를 이미지로 인식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영화라는 매체를 연극과 비슷한 장르로 해석해서 받아들였다. 연극과 영화의 서로 다른 형태적 특성들은 모두 배제한 채 연극과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이야기 전개'가 있다는 특징과 그것을 '연기로 표현'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초기 한국 대학들의 교육 편제가 연극과 영화를 한 데 묶어 '연극영화전공'으로 시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문·사·철(文·史·哲) 을 중요시한 우리나라는 연극이나 영화·문학을 모두 이야기 구성, 즉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으로 인식했다. 예전 한국 영화들을 보면 좋은 이야기는 꽤 있는데 좋은 화면들은 찾아보기 힘든 것도 다 이런 시각 탓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서양은 영화라는 매체를 이미지 위주로 생각했고, 대학에서의 영화교육도 편제상 미술대학 안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영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인식하고 시작했던 만큼 이미지를 다루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서양에서는 많은 것들을 먼저 이미지로 인식하고 이에 따라 뜻을 풀이한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격언도 있듯이 먼저 '보아야 믿는' 것, 유물론적 사고들이 바로 서양의 기본적 의식이자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영상·미술·디자인·광고 등 많은 시각예술·시각매체들이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이미지를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앤디 워홀의 단순한 그래픽적 실크스크린 기법 이미지는 키스 해링 이미지와 함께
지금도 광고에 많이 활용되는 스타일이다. 만화 이미지를 차용한 리히텐쉬타인의 이미지들도
단순 명쾌한 특징 때문에 많이 애용된다.
<그림2>팝아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적 요소 뿐 아니라 대중의 중심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이념적 배경이 광고나 대중예술과 맞닿아 있다
팝아트 이미지들을 활용한 이효리 앨범 티저광고.
이미지 중의 이미지, Fine Arts
'Art is Long, Life is Short.' 여기서 아트는 예술이 아니라 학문 전반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고등학교 영작문 시간에 수도 없이 들었다. 아트 중에서도 예술, 혹은 미술은 Fine Art라고 칭한다. Fine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최상급의, 아름다운, 기술이 뛰어난, 품위 있는, 정교한', 즉 서양의 개념으로는 예술·미술을 학문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최상급의 품위를 가진 학문 분야로 본 것이다.
Fine Art, 순수미술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가장 독창적이고 실험적이며, 그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첨단의 이미지들을 생산해내는 분야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가장 창의적인 비주얼들을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색다른 시각과 컨셉트으로 보여준다. 사상과 정의, 관념과 편견 등 그 어떠한 외부 요소에도 영향 받지 않고 가장 독립적이고도 주관적인, 절대가치적인 미적 기준을 제시한다.
그리고 순수 미술에서 생산된 이런 이미지들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다양한 분야와 역할로 변형되어 자의든 타의든 여러 다른 곳에서 활용되고 재생산된다. 비단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네들의 독창적이고도 주관적인 아이디어·컨셉트·철학과 관련된 영감들이 끊임없이 제시되고,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분야에 자연스럽게 혹은 불편하게 스며들며 사회 문화 전반에 녹아들어간다. 이러한 순수 미술의 특징과 흐름만 잘 파악하고 있어도 이미지 흐름의 기본적 근간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3> 드가ㆍ르느와르 등의 인상파 회화의 이미지를 활용한 LG 기업광고. 인상주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화풍은 많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요소이자 품위 있고 우아한 톤으로 제품을 소구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인상파도 당대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그림4>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이용한 헬스클럽 광고. 전신 누드를 보여주면서도
전혀 외설적이거나 도발적이지 않고 예술적이면서도 고급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방법의 제시가 가능한 사례이다.
사치앤사치에서 순수미술그룹을 키우는 이유 ?
십여 년 전 일러스트레이션을 의뢰받고 뉴욕타임스 아트 디렉터의 방에 들렀을 때 서가에 디자인 서적은 한 권도 없고 순수회화 화집만 잔뜩 꽂혀있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란 경험이 있다. 디자인 서적을 자꾸 보면 비슷한 아이디어만 나오게 되고, 순수미술을 보면 새로운 시각과 더불어 더 넓은 개념의 컨셉트가 보인다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애니메이션 <쉬렉>의 테크니컬 디렉터가 피오나 공주의 오묘한 스킨 톤을 표현하기 위해 렘브란트 그림의 다양한 빛에 따른 색채 표현을 집중 연구했다는 말이 수긍이 된다. 영화감독 타셈 싱(Tarsem Dhandwar Singh)이 자신의 영화 <더 셀(The Cell)>을 제작할 때 수십 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해 순수미술에서 나오는 이미지들을 낱낱이 조사하여 영화의 이미지에 활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데이비드 린치(David Keith Lynch)는 영화 제작 틈틈이 페인팅을 하며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고, 지금은 고인이 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수채화 시리즈는 지금도 전 세계를 돌며 순회전을 하고 있다.
<그림5>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활용한 이브 생 로랑 광고.
대부분의 고전주의 작품들은 어두운 듯하면서도 그 기품과 중후함을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미스터리한 모나리자의 이야기들이 이브생로랑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잘 연결되는 광고이다.
<그림6>앵그르의 그림 '샘(The Spring)'의 포즈를 이용한 샤넬 광고. 만지고 싶은 여자를
그리는 화가라는 애칭답게 관능적이면서도 사랑스런 포즈를 향수 광고에 이용했다.
작품의 포즈를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은 느낌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광고가 됐다.
뉴욕에서 광고인들이 자주 가는 고급 레스토랑에는 항상 현대미술 작가들도 많이 모인다. 유럽이나 뉴욕 광고회사의 많은 아트 디렉터들은 앤디 워홀이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요즘 같으면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이나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같은 현대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예술적 영감을 얻으려고 애쓴다. 사치앤사치 같은 경우 아예 순수미술에 뛰어들어 yBa(Young British Artists) 같은 그룹을 키워내는 것을 보면 순수미술이 얼마나 광고와 밀접해 있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림7> 현대 사진의 거장 '길버트와 조지'의 이미지를 활용한 나이키 광고. 마치 스테인드글래스와 비슷한 레이아웃과 색상을 통해 그래픽적으로 단순하고 화려하며 명쾌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그림8>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이미지를 이용한 LG 광고.
전통적이고 기품있는 풍속화의 분위기와 역시 역사와 품위의 LG 이미지를
잘 우려냄으로써, 우리 정서에도 맞고 예술적인 친근감과 위트가 있는 광고가 되었다.
<그림9> 콜라주 기법을 활용해 거친 아웃도어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지프 체로키 광고. 콜라주는 2차 대전
이후 다다이즘 때부터 많이 나타난 미술 표현 기법인데, 팝 아트 이미지들과 함께 그래픽과 광고에
많이 적용되는 이미지 표현 방법이다.
이미지의 유산(Heritage)찾기
새로운 것, 독창적인 것, 색 다른 것, 독특한 것, 나만의 것... 수도 없이 노래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비슷하거나 따분한 아이디어와 이미지만 돌아다닌다. 아무 의미 없이 앞만 쳐다봐서 색다른 무엇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면, 우리 시대 이전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뒤돌아보기만 해도 새로운 시각이 보일 수 있다. 그냥 맹목적으로 색다른 것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어떤 이미지들이 있었는지 이미지의 지도를 다시 펼쳐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쳇바퀴 돌듯 내가 속해 있는 동네에서 벗어나 또 다른 넓은 개념, Fine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그런 동네를 한 번 쳐다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얻은 최상급의,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정교하고도 뛰어난 Fine한 영감들을 잘 활용하고 연구해 직, 간접적으로 접목시키기만 해도 아주 훌륭한 이미지들이 나올 수 있다. 태양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단다. 저 멀리 파랑새 찾다가 허송세월 보내기보다는 내게 있는 좋은 유산(Heritage)은 무엇이 있는지 등잔불을 켜고 찾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