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의 시대
2009.04.24 12:00 Cheil Worldwide, 2009년 03월, 398호, 조회수:4129
노도철 ㅣ 문화방송 드라마국 프로듀서 meurso77@yahoo.co.kr
"근데, 왜 제가 그걸 써야하죠?"
'종합병원2' 작업하느라 몸이 불고, 장가는 가야겠고,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인조인간 같은 마스크를 한 동네 아줌마들 뒤를 따라 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 받을까 말까..... 불규칙적인 번호 배열로 봐서 스팸 대출번호는 아닌 것 같고, 제일기획 사보편집실이란다. 드라마 PD인 나에게 생뚱맞게 원고를 하나 써달랜다. 아니 도대체 광고회사의 사보에 무슨 내용의 글을 쓰라는 건지.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외마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소위 '막장'이 핫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이것저것 따지거나 격식을 차릴 시간이 없다. 그냥 끝까지 달려! 재밌으면 그만이다. 저녁 7시만 되면 사람들은 막장 중에 막장이라고 신나게 씹는 그 막장드라마를 못 봐서 그야말로 미친다. 근데 도대체 막장드라마가 뭐냔 말이다? 불륜, 혼전임신, 복수, 강간, 청소년 탈선, 운명의 순애보, 이혼.... 이런 걸 다루면 다 막장 드라마일까? 아니다. 이런 소재들이 하루 아침에 나온 것도 아니고 300명의 전사가 뛰어다니던 스파르타 시절 전부터 내려오던 드라마트루기의 소재가 아니던가? 그럼 뭐야?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임성한 작가의 '인어아가씨'니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 때만 해도 최소한의 드라마 속도라는 게 있었다. 복수를 하더라도 뭔가 준비하고 재고하는 시간 말이다. 혹은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같은거. 근데 이젠 그딴 거 안 먹힌다. 너무 더뎌, 뻔해, 안 재밌어! 그래서 해결책은 광속으로 달리는 거다. 그러니 하루라도 빼먹으면 궁금해 미친다. 브라보! 요즘 대중문화계는 막장의 테크닉에 흠뻑 도취되어 버렸다.

하물려 한 시간짜리 드라마가 이렇게 미친듯이 달려가는데 15초 광고시장은 요즘처럼 잘 안 웃어주고 안 감동받는 대중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광분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하다. 게다가 이  막장의 후유증은 광속으로 달린 만큼 금방 싫증난다는 거다. 그래서일까? 최근 광고의 경향은 시리즈물이 대세일 것 같다. 예전처럼 빅 스타가 나오는 광고 하나로 6개월을 버티는 게 아니라 일반인들, 아기들, 동물들이 번갈아 바통 터치하며 연이어 웃음 폭탄을 터뜨려주시는 거다. KTF의 'SHOW'광고가 연이어 히트를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쨌든 나로선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내가 평소 알고 있는 스타들이 뻔뻔하게(?) 웃으며 나오는 광고에는 도저히 몰입이 안된다. 빌 머레이,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에서 헐리우드 배우인 밥 해리스가 일본 CF감독의 호통에 어리둥절하며 산토리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자꾸 연상되기 때문이다.

고로 나의 결론은, 막무가내로 조르는 원고 따윈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는 거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이 메일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막장의 시대,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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