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詩의 위로
2011.06.27 02:07 HS Ad, 조회수:4451









글 ㅣ 조성은 (채은석 GCD팀 ACD)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쳐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가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 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 - 이병률
  
 
 
 
<바람의 언덕> photo by Choco
 

 
환희도 참담함도, '그쯤이야...'

어떻게 5개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는지도 모르게 2011년의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모두들 정말 어떻게 이 봄을 보내고 있을까? 폭풍업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꽃은 폈고, 끝없이 치열한 날들 속에서도 바람은 따뜻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봄은 허전하다. 여전히 기운이 없다. 그럴 때마다 손에 잡는 것은 시집이다. 물론 술잔도 잡지만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답답하거나 뭔가 복잡하거나 뭔가 미치도록 불안할 때 난 시를 잡는다. 시의 바짓가랑이를 잡는다.

시는 언제나 나의 감정보다 더 깊숙하고, 나의 기분보다 담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있든, 혹은 반대로 얼마나 높은 구름 위를 날아다니든 시는 늘‘ 그쯤이야…’라는 시선으로 나를 본다. 그러면 나는 다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다.
 
 
삐딱하게 가보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특히 난 이병률의 시를 가장 많이 잡는다. 그 분의 통찰력과 관대함에 위로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 분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상적인 삶을 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요. 살짝 비정상이 돼서 남의 시선도 좀 받고,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정말 맘에 안 들 정도로 삐딱하게 한번 가보는 것,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니.... 아, 이 기운 없는 봄날에 얼마나 자양강장제 같은 한마디인가.
 
 
몸과 마음이 꽁꽁 묶여도, 그.래.도!

이제 곧 여름이다. 혹시나 기나긴 여름동안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데 발이 꽁꽁 묶여서 짜증이 난다거나, 빚 독촉보다 더 무시무시한 아이디어 독촉을 받게 된다면 시의 위로를 한 번 받아보시라. 마음에 반짝, 시원한 휘센이 되어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메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 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서
더 아름다운 피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서도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 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의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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