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문화읽기] 누구나! 가슴속에 할리퀸 한 권쯤은 품고 살잖아요~
2012.04.10 02:17 the AD, 조회수:6533



나름 풋풋했던 여고생 시절, 꿈과 환상의 세계로 날 인도해준 것은 손바닥만한 책들이었다. 이 책들과 했던 나의 '흑역사(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를 가리키는 신조어)'를 살포시 고백 혹은 추억해보고 한다.
 

독서실 책장 속에는 참고서가 없었다.
그렇다. 부모님은 내가 독서실에서 공부만 하는 줄 알고 계셨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알고 계신다. 하지만 난 독서실에서 엄청난 세계를 만나버렸다. 독서실 친구의 책장 속에는 참고서가 아닌 <할리퀸 시리즈>가 잔뜩 쌓여있었다. 그 친구의 자리에서 난 할리퀸에 중독돼버리고 말았다.
 
매일 학교를 마치고 독서실에 도장을 찍으며 들어서곤 우선 그 친구 자리에 갔다. 그 친구 자리는 거의 도서대여점 수준이었다. 독서실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자리는 '할리퀸 자리'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아이의 책장을 열어 아직 읽지 않은 할리퀸 한 권을 손에 들고 내 자리로 갔다.  
 


독서실에 대한 예의상(?) 교과서도 떡하니 한자리에 두고, 할리퀸을 열었다. 아~ 그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 곳에는 안경 쓰고, 이마엔 여드름이 득실득실 하고, 닳고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꽉 끼는 교복을 입은 우중중한 여고생은 없었다. 할리퀸의 세상엔, 평소에는 안경도 쓰고 머리를 묶고 다니지만, 머리 푸르고 안경 벗으면 초특급 미녀로 변신하는 여주인공이 존재했다.

 남자 주인공은 또 얼마나 멋진가. 늘 수트에 몸을 숨기고 다니다가 이따금 구릿빛 피부를 드러내는 금육남!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옥신각신 싸우다가 정이 들며 사랑에 빠지고, 주변의 질투로 인한 오해 한 번, 그리고 늘 그렇듯 해피엔딩(전설에 따르면 여자주인공이 죽는 새드엔딩이 있다고는 한다. 읽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뻔한 스토리(?)라면 어떤가. 재미있는 걸! 계속 읽고 또 읽는 수 밖에! 만날 똑같은 일상 속에서 <할리퀸>은 내겐 한줄기 로맨스였고 판타지였다. 그러나 입시준비, 대학생활, 나이듦의 과정을 걸으며 '할리퀸은 유치해'하는 생각들로 할리퀸은 내게서 멀어져갔고, 그 설렘도 잊은 지 오래다.
 


 
할리퀸은 할리퀸이 아니야

그런데 최근 다시 할리퀸이 떠올랐다. 형태를 아주 새롭게 바꿔서. <성균관스캔들>이라는 드라마로 인해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을 읽게 됐고, 무언가 가슴속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 샘솟았다. 이 기분은 바로 오래 전에 느꼈던,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순정신경'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바로 그것, '설렘'이었다. 
 
최근의 <해를 품은 달>로 다시금 주목 받기 시작한 순도 100%의 로맨스소설로 내 가슴속 할리퀸의 추억이 다시 생각났다. 이것들이야말로 더 정교화되고 더 멋스럽게 바뀐 '조선판 할리퀸'이 아닌가(이거 엄청난 칭찬이다~) 바뀐 것이 있다면 할리퀸을 읽었을 때는 '아, 나도 이렇게 연애하고 싶다. 대학가서 살 빼면 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라는 감정이었고, 지금 <해품달>을 읽을 때는 '아, 이런 감정도 있었지'라는 소회라는 점이다.
 
한 때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흑여사'로만 치부해버렸던 할리퀸이 이제 내게 다시 다른 감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내게 말랑말랑한 감정의 소용돌이이며, 잃어버린 순수함이며, 콩닥콩닥 온몸을 달달하게 만들어준 사탕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둣모습이 됐다.
 
잊어버릴 뻔 했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준, 세상의 모든 로맨스에 감사한다. 지금 우리가 읽는 것이 손바닥만한 <할리퀸>이든 HDTV로 보는 드라마 <해품달>이든.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