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nge Essay]다르지만 각자 빛나는 삶
2016.01.20 12:00 INNOCEAN Worldwide, 조회수:4561
 


text. 장인주
이노션 스페인법인/이태리법인 법인장. 2005년부터 이노션 해외광고팀을 시작으로, 유럽본부, 러시아법인을 거쳐 현재 스페인법인과 이태리법인을 책임지고 있다. 스포츠와 글쓰기라는 두 갈래의 관심사를 소일거리로 삼고 있다.
 

다르지만 각자 빛나는 삶

이제 꽤 길었던 유럽에서의 인연이 마무리된다. 정해진 복귀 일자도 없이 런던에서 시작된 출장에 이어, 프랑크푸르트와 모스크바, 마드리드에 주재하게 됐다. 소비자를 이해해보자는 일 욕심과 자연스러운 호기심으로 마드리드 사람들을 열심히 지켜봤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Que tal(께딸)?’이라는 스페인어 인사가 있다. ‘어때?’ 혹은 잘지내?’라는 뜻으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을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편하고 흔한인사말이다. 이제 간단한 스페인어 인사는 할 줄 알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게 되는 이 인사말을 스페인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여전히 편하지 않다. 여기 사람들은 ‘Que tal?'에 대개 ’Muy bien(아주 좋아)‘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나만 세상 고민과 걱정을 다 안고 사는 건가? 나는 기껏해야 ’Asi Asi(그냥 그래)'라고 해야 맞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Mal(별로 안 좋아)’, 혹은 ‘Muy Mal(무척 안 좋아)’인 날도 많은 데 말이다. (영어의 ‘How are you?’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여긴 좀 더한 것 같다.)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Perfecto(완벽해)’, ‘Phenomenal(굉장해)’, ‘Fantastico(환상적이야)’, ‘Excellente(대단해)’라는 단어를 쓴다. 단어 뜻대로 엄청나게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그냥 옷을 ?긴 세탁소가 제 시간에 수선을 마치거나, 친구와 어디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정했거나, 저녁에 일찍 들어가기로 했다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내용이다. 또 이 사람들은 단어 끝에 ‘-simo'를 붙여 최상급 표현도 자주 쓴다.
 
‘Bonosimo(엄청 예쁘다)’, ‘Guaposimo(정말 잘생겼다, 예쁘다)’. ‘이미 많다는 뜻의 ‘Mucho'’Muchisimo'로 만든다. 감정의 과잉이라는 단어까지 떠오를 정도로 스스로 느낀 것을 거침 없이 주저 없이 표현한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없는 감정을 억지로 과장했다기보다는 실제로 그렇게 많이 느끼고 그 느낀 만큼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런 풍성한 표현은 스스로를 무한하게 긍정하고, 주어진 인생을 매 순간 즐기며 살아가는 낙관적인 자세 때문인 것 같다(객관적으로는 스페인은 지난 10년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어려운 상황을 겪어냈다), 이런 긍정적인 삶의 중심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존중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큰 관심도 없고, 그로 인해서 나의 삶이 영향 받을 필요는 없다.
 
어떨 때 보면 정말 눈치가 저리 없나 싶을 정도로 주위에는 관심이 없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매해 유행 아이템이나 색상이 있지만, 정말 그런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서울에는 정말 난리가 났다던 H&M과 발맹 컬래버레이션도 일부 패션 피플들의 행사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이 지나가버렸다. 드라마 하나로 갑자기 모든 젊은 여성이 같은 립스틱에 열광하고 똑같은 머리 모양이 등장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같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기 느끼는 대로 입고 행동한다. 전 국민의 대다수가 구교인 가톨릭 신자지만 종교나 성적인 정체성에 모두 무척 열려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 어떤 성 정체성이든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결혼 증명서에는 남편/부인이라는 표현 대신 첫 번째 배우자, 두 번째 배우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해변 한쪽에서는 누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고 그들에게는 딱히 어떤 시선도 보내지 않는다.
 
스스로 인생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잣대로 서로의 인생을 비교하고 재단하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역시 몇몇 선호되는 직업은 있지만, 모두가 같은 직업, 같은 학교, 학과별 순서가 정해지는 일은 찾을 수 없다. 각자의 인생은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직업이 다른 서로에게 느끼는 상하 관계가 그리 강하지 않다.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와 주민들은 친구처럼 지내는 게 당연하고, 체육관에서 걸레질하시던 분도 근무를 마치면 바로 다른 회원들과 어울려서 운동한다. 각자의 자리가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 자리에 대한 가치 판단은 최대한 자제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런 삶의 자세가 우리보다 길고 그래서 안정된 자본주의의 역사와 안정된 사회 보장 시스템 때문이고, 온화한 날씨와 넓은 영토를 기반으로 한 풍부한 농산물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이렇게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여유 있는 삶의 자세가 미래의 성장 동력을 약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말과는 달리, 우리 삶은 모두 같은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행군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모두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길을 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많은 것들-설렘과 두려움, 기쁨과 실망, 아쉬움과 보람 같은 감정, 만나서 미워하고 만나지 못해서 안타까운 사람들-이 결국 삶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느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그러나 희망을 담아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큰 목표, 큰 걱정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내가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작은 기쁨을 누리고 살려고 한다. 이런 다양하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태도에서 피카소 같이 같은 사물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입체파가 나오고, 달리나 가우디 같은 환상적인 예술 작품과 건축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르지만 각자 빛나는 삶, 그게 바로 스페인 사람들이 풍성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 보인다.
 
송년회 행사로 동료들과 마드리드 버스 투어를 했다. 이곳에서 보낸 5년의 시간이 마드리드 풍경보다 더 생생하게 지나간다. 이제 마드리드에 안녕을 고해야 할 시간이 왔다.
 
Adios Madrid(아디오스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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