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4-STYLE] 스포츠가 패션을 바꾼 순간들
2016.08.05 12:00 INNOCEAN Worldwide, 조회수:7759
Sports, Big Influencer of Fashion History
스포츠가 패션을 바꾼 순간들



스포츠와 패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두 가지 모두 우리 몸에 관련된 것이니까. 그리고 21세기 들어 스포츠는 패션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다. '놈코어' 트렌드에서 파생한 '애슬레저'가 장기전의 형국에 접어든 게 그 증거다. 하지만 19세기에만 해도 스포츠와 패션은 거리가 멀었다. 으스러질 만큼 갈비뼈를 조이던 코르셋을 떠올려보라. 1백 년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만난 스포츠와 패션. 이 밀월 관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지 들여다본다.

TEXT. 이선영 (패션 저널리스트)




B.C.776~1910s
변 변 한  스 포 츠 웨 어  하 나  없 던  시 절

스포츠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776년 그리스인이 창시한 올림픽은 사실 신을 숭배하기 위한 거이었다.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고 올림픽을 통해 그 결과를 보여준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유적 속 그림이 증명하듯, 스포츠를 즐기는 인간은 헐벗은 채였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이들은 그나마 일상복과 비슷한 옷차림을 했다. 무려 1920년대가 되기 전까지 말이다. 1900년대 초 패션은 고통 그 자체, 코르셋의 시대다. 가슴에서 허리를 거쳐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S라인'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무리한 착용으로 갈비뼈 골절이나 장기 변형을 야기하기도 한 코르셋, 1910년대에 접어들자 상류층 사이에서 테니스와 승마, 크로켓 등 운동을 하는 것이 여가생활의 일부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성들은 운동하는 동안에서 코르셋을 벗을 수 없었다. 당시 운동의 목적은 건강보다 사교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지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상황은 1920년대에 접어들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했다.


1920s
스 포 츠 를  위 해  코 르 셋 을  벗 어  던 지 다
테니스 선수 수잔 랭글런, 그리고 디자이너 장 파투와 가브리엘 샤넬은 1920년대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윔블던 대회에서 6차례 우승을 거머쥔 선수 수잔 랭글런은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파격적인 패션 감각으로 많은 이목을 끌었다. 1921년 경기장에 선 그녀는 감귤색 헤어밴드를 두르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흰색 실크 주름 원피스에 단추가 달린 민소개 스웨터를 걸치고, 매듭 무늬 스타킹을 신은 차림이었다. 테니스 코트를 이리저리 오가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편안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은 세련된 옷차림. 바로 장 피투가 디자인한 의상이었다. 테니스 웨어의 성공과 함께 장 파투는 이내 스포츠웨어를 다루는 부티크를 파리와 도빌에 개점해 테니스, 골프, 요트, 승마, 항공 의상을 선보였다. 장 파투가 자신의 부티크 '르 쿠앙 데 스포츠'에서 로고를 처음 의상에 도입하고 니트 소재의 비키니를 선보인 시기,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상류층이 즐겨 찾던 프랑스 북부의 휴양도시 도빌에서 영감을 받은 리조트 웨어를 선보인다. 흰색과 감청색의 단순한 줄무늬 상의에 통이 넓은 바지를 매치한 '도빌 패션' 그리고 '비아리츠 패션'이 그것이다. 스포츠웨어와 여가생활을 향한 샤넬의 관심은 이뿐이 아니었다. 1924년 발레 공연 <푸른 기차>에서 의상을 담당한 샤넬은 저지 소재 수영복, 그리고 대담한 프린트의 스웨터에 양말을 매치한 골프 웨어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기능을 앞세운 편안함에 더해진, 품위를 잃지 않은 현대적 감각, 수잔 랭글런과 장 파투, 가브리엘 샤넬이 스포츠웨어로 시대를 풍미한 비결이다.
 
1950s
신 소 재 발 명 으 로  꽃 피 우 는  스 포 츠 웨 어
'석탄, 물, 공기로 만든 기적 같은 신소재의 탄생. 거미줄보다 가늘지만 강철보다 강하고, 비단보다 우수하다.' 1938년 10월, 20세기 100대 발명품 중 하나인 나일론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미국 화학회사 듀폰이 신문에 낸 광고다. 실크처럼 부드럽지만 내구성이 뛰어난 나일론과 레이온은 신축성을 보완하는 라텍스와 라이크라 등과 함께 천연섬유를 능가하는 인조섬유의 시대를 열었다. 스키 선수 출신의 윌리 보그너는 새롭게 열린 인조섬유 시대를 선도한 인물이다. 1930년대 올림픽 스키 종목의 각종 메달을 휩쓸던 그는 1932년 스키웨어를 론칭, 울과 나일론을 혼방해 스트레치성이 뛰어난 스키 바지를 선보였다. 하지만 윌리 보그너의 의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건 전쟁 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여가 생활로 스포츠를 즐기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기능성이 뛰어난 스포츠웨어의 수요 또한 증가한 것. 마릴린 먼로와 제인 맨스필드, 잉글리드 버그만 등 유명 여배우들이 앞다투어 보그너의 홍보대사로 나섰고, 생 모리츠의 하얀 설원이 보그너의 원색 의상으로 가득 찼다. 1950년 뉴햄프셔에서 론칭한 헤드, 1952년 침낭과 방수 소재 점퍼를 선보인 몽클레르와 함께, 보그너는 1950년대 신소재 발명으로 불붙은 스포츠웨어 열풍의 한가운데 있었다.


1980s
일 상 에  들 어 온  스 포 츠 웨 어

1980년대 스포츠는 일상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관람은 물론, 직접 참여하는 스포츠 또한 득세했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축구, 씨름, 배구, 농구 등 프로리그가 등장했고, 1986년 열린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열린 서울 올림픽이 스포츠 열기를 가속화했다. 스포츠와 건강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스포츠웨어로 이어졌다. 트레이닝복은 교복 자율화 아래 일상복이 되었고, 이와 함께 스포츠 브랜드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81년 한국에 론칭한 나이키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 스포츠 열기의 핵심에 있었는데, 여기엔 조던 시리즈의 성공이 큰 역할을 했다. 1985년,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에 자신의 이름을 딴 농구화를 만들자고 제안한 마이클 조던. 이를 수락한 나이키는 기존 모델인 '덩크'와 비슷한 형태로 '에어 조던 1'을 만들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디자인에 투자할 생각이 없었던 것. 하지만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공중에 뛰어올라 덩크 슛을 날리는 마이클 조던의 모습을 형상화한 '점프맨'과 함께 에어 조던 시리즈는 2007년까지 22종의 모델을 선보였다. 120년 농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 마이클 조던. 그는 조던 시리즈의 성공과 함께 스포츠 마케팅 분야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스포츠의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2010s
기 능 과  실 용 의  스 포 츠 웨 어 를  등 에  업 은  패 션

애초에 패션과 스포츠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19세기엔 패션을 위해 건강을 희생해야 했고, 20세기엔 스포츠를 하려면 패셔너블함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했다. 이런 양상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변화를 맞았다. 물과 기름처럼 보이던 패션과 스포츠가 공생 관계를 맺게 된 것. '애슬레저(Athleisure)' 트렌드는 그 현상을 엿볼 수 있는 키워드다. 애슬레틱(Athletic: 운동 경기)과 레저(Leisure: 여가)를 합성한 단어 애슬레저는 스포츠의 일상화를 상징하는 단어로, 스포츠웨어 특유의 기능성을 일상에 입는 캐주얼웨어에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브랜드들이 지금 가장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들과 매 시즌 선보이는 컬래버레이션 라인이 그 예다. 나이키는 '나이키 랩'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공격적으로 애슬레저 트렌드를 저격하고 있다. 이들은 사카이의 치토세 아베,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을 컬래버레이션에 끌어들였으며, 리우 올림픽을 기념해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언더커버의 준 타카하시, 루이 비통의 킴 존스와의 컬래버래이션을 선보인 참이다. 그런가하면 샤넬, 에르메스, 디올 같은 하이패션 브랜드의 패션쇼에서 스니커즈를 매칭한 차림을 찾아보는 것 또한 예삿일이 되었다. 스포츠웨어와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캐주얼웨어의 범주를 너머 포멀웨어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슈트는 스니커즈에 매치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폭이 좁고 짧아졌으며, 스니커즈는 모노톤의 슈트에 어울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단순하고 점잖아졌다. 사무실 내에서 타이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면서 티셔츠 또는 반바지로 완성한 슈트 차림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은 스포츠웨어 특유의 기능성을 일상의 의상에 접목, 보다 편안한 착용감을 선사하기 위한 것이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아름다움과 가치의 기준은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상을 관찰하기에 패션만큼 적합한 것도 없다. 일찍이 칼 라거펠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패션은 단지 옷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라고. 이번 호 주제인 스포츠를 패션의 틀에서 들여다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해온 패션 속에서 스포츠의 흔적을 파헤친 이 기사를 통해 스포츠를 향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목격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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