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大)항해 시대의 생존법
“쉽지가 않아요.”
중국법인 인사 총괄 길기준 프로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경고 아닌 경고부터 했다. 먹거리 많은 중국 시장이지만 그만큼 경쟁자도 많고 변수도 다양하기 때문에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재원 선배들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면 미디어 환경도 한국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 규모 역시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제일 그레이터 차이나(Cheil Greater China)가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제일 펑타이는 다양한 디지털 마케팅 분야 진출로 수익 구조를 다양화하며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왜 ‘광고회사’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그 ‘너머(Beyond)’를 내다봐야 하는지 치열한 중국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질문도 열심히 쏟아내는 신입사원들
중국의 마케팅 에이전시들은 어떻게 살아남고 있을까? ‘광고문(Adquan)’이라는 회사의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광고문은 중국 마케팅 시장에 대한 정보 콘텐츠를 제공하는 에이전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중국 클라이언트와 글로벌 에이전시를 중개해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야말로 중국 마케팅 시장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GIM(Good Idea Media)’이라는 소셜미디어 에이전시 역시 남달랐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바일, SNS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이 회사는 중국 인플루언서 기반 마케팅에 특화돼있었다. 또한 직원 대부분이 20대로 최신 모바일 트렌드와 소셜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강점이었다. 몸집 작고 전문화된 부티크(Boutique) 에이전시들이 글로벌 클라이언트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젊은 에이전시들은 피 터지는 레드 오션을 자신들만의 블루 오션으로 멋지게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항해 시대다.
▲ 중국 검색광고 시장의 관문, 바이두 견학
새로운 소비자 경험을 찾아서
마케팅 에이전시 외에도 베이징 내 여러 리테일 매장을 방문, 견학했다. 제일기획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리테일 사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다양한 매장에서 쇼핑 경험이 어떻게 디자인돼있는지 직접 체험해보면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종합 전자상가에서 삼성전자, 화웨이, 샤오미 등 여러 스마트폰 브랜드 매장을 둘러봤다. 브랜드 컬러인 파란색 대신 흰색으로 벽면을 채운 삼성전자 리테일 매장은 소비자가 차례로 제품을 둘러보기 쉽게 디자인돼있었다. 특히 다른 브랜드와 달리 제품 라인별로 매대(賣臺)가 섬처럼 구성돼있어 각 모델별 특징과 장점을 파악하기 용이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 베이징 종합 전자상가 내 삼성전자 매장
하지만 경쟁 브랜드들도 만만치 않았다. 오포(Oppo), 비보(Vivo) 매장에서는 피아니스트의 도전을 통해 제품의 기능을 직접 보여주는 영상으로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설명(Explanation)’보다 ‘쇼(Show)’ 마케팅이 더 효과적임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산리툰의 애플 매장에서도 리테일 경험의 중요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디에도 제품 사양이나 설명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런 정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 다들 일단 써본다. 그리고 궁금한 것만 프로모터들에게 물어본다. 결국 중요한 건 경험이다. 체험용 아이폰에 깔려있는 앱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사소한 디테일이 소비 경험을 더욱 다채롭게 만드는 것이다.
애플 매장 맞은편에 메르세데스 벤츠 플래그십 매장이 있어 들러봤다. VR 체험이나 디지털 사이니지도 잘돼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층에서 열린 미술 전시였다. 독일 예술가의 탄생 100주년을 왜 벤츠에서 기념하는가? 벤츠는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동차 매장이 아니라 미술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다 새로운 브랜드 익스피리언스를 개발하기 위한 인사이트는 결국 문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변화의 물결, 삶과의 공존
셋째 날 방문한 798예술단지는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는 최초의 예술특화지구이다. 1957년에 세워진 전선공장 지역이었는데 런던의 테이트모던(Tate Modern)이나 뉴욕의 소호(SOHO)처럼 예술가들이 버려진 공장을 개조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세련된 카페와 갤러리들 사이로 여전히 남아있는 공장 건물의 잔해들이 독특한 풍경을 연출했다.
▲아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798예술단지
우리가 갔을 땐 아트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가장 규모가 크고 다양한 전시를 열고 있는 곳은 UCCA(Ullens Center for Contemporary Art)였다. UCCA는 2007년에 개관한 비영리기관으로 798예술거리에서 대중들에게 현대미술과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엔 중국 화가인 쩡 판즈(Zeng Fanzhi) 특별전이 열렸다. 사회주의 미술의 전통에 현대적인 해석을 더한 그의 작품들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독특했다. 중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 담긴 작품들이었다.
‘삶 속의 이노베이션’이라는 주제로 디자인 전시도 열렸다. 일본의 하라 켄야를 비롯한 5명의 가구, 공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공통된 메시지: 결국 혁신도, 디자인도, 예술도, 모두 삶과 맞닿아있을 때 유의미하다! 일상과 사회에 대한 성찰 없이는 좋은 마케팅, 좋은 캠페인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골목의 작은 갤러리들을 탐방하니 전통적인 중국의 수묵화부터 실험적인 비디오 작업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인상적인 것은 중국의 전통 예술이나 사회상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작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 내가 지금 중국에 와있구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초고속으로 발전 중인 중국 사회지만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천천히 흐르고 있는 듯했다. 빠른 변화를 좇아 가는 건 필수겠지만, 속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파열음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미래 혁신의 물결과 인간의 삶은 평화로운 공존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 때쯤 중국의 또 다른 얼굴들이 보였다.
백문불여일행(百聞不如 一行)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 뻣뻣하게 돌아다니는 공안들을 상상했지만 베이징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가의 외제차로 가득한 길거리,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들. 이미 많이 들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보니 달라도 너무 달랐다. 스치하이에서는 거리 곳곳의 QR코드 기계를 통해 사진을 전송할 수 있었고, 산리툰의 대형 스크린에 걸린 디지털 이미지들은 정교하고 세련됐다. 하루하루가 중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물론 느린 사람들의 느린 삶도 공존하고 있었다. 매일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 하루는 재래시장의 작은 국수 가게에 들어갔다. 국물도 거의 없는 밋밋한 우육면을 후루룩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가족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국수를 나눠먹는 사람들. 직접 대화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삶은 분명 산리툰의 젊은이들과는 다를 것이다.
사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다르고, 모든 것이 새롭다. 누군가는 넓게 알아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깊게 파야 한다고 말한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이면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돼야 한단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우리에게 주재원 선배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일단 한번 부딪쳐봐, 깨지면서 배우는 거지!”
짧은 5일이었지만 직접 온몸으로 부딪쳐보니 조금이나마 중국에 대한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좀 더 부딪쳐 보면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4박 5일 간의 연수를 통해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지식이나 정보보다 ‘일단 덤벼보자’는 자신감이다. 깊고도 넓은 마케팅의 바다에 첫 발을 내딛는 신입 사원들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무기가 있을까?
자, 순풍을 받았으니 이젠 힘찬 항해를 위해 돛을 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