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라는 이름의 원더우먼
2009.07.06 10:51 Cheil Worldwide, 2009년 06월, 401호, 조회수:6447
김태훈ㅣ팝칼럼니스트, DJ Yesterdaybefore@hanmail.net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게 수치의 대상이었다. 외출을 위해 즐겨타던 만원버스라는 공간은 어머니라는 신성불가침의 한 여성을 단숨에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용맹한 암사자처럼, 육상선수의 그것처럼, 빈자리를 찾아내고, 날렵하게 몸을 던져 소유권을 주장하던 그 당당함은 관찰자의 역할을 자처한 나에겐 품위 없음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떠들썩한 시장의 매대앞에서도 예외 따윈 없었다. 100원, 200원의 이득을 위한 길고 지루한 논쟁이 있었고, 옷가게에서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히며 어린 아들을 볼모로 세워 협상을 승리로 이끌던 어머니의 모습이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곳에 우아한 어머니의 자태 따윈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마 그런 나의 어머니를 아줌마라는 젠더로 불리시켜 조소 섞인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청소년기의 어느 날, 일본 소설<오싱>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있다. 한 여자의 기구한 일생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고된 삶 속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생명력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문학의 날카로운 입김에 여린 감수성이 세례를 받아가던 젊은 날, TV의 한 책 소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텍스트로 등장한 <오싱>에 대한 이야기가 꽤나 지루하게 전개된던 프로그램의 말미,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교수는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사실<오싱>이라는 이 소설이 그렇게나 높게 평가될 수 있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다. 6.25를 겪으며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키운 우리 어머니들은 모두 오싱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꽤 오래 그 교수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던 것 같다. 책 속에 활자화된 한 아줌마의 이야기는 그토록 감동적이었는데, 왜 일상에서 늘 부딪히고 겪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에 그토록 경멸의 논추리를 보냈었는지. 반성과 자각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내조의 여왕'은 한 여성이 어떻게 아줌마로 변신(!)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생물학적 혹은 일류학적 관찰기이다. 광고 속에서 여신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김남주는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돌파구를 아줌마라는 영영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적인 듯 보여진다.

드라마의 축약본 하이라이트 같은 에쓰-오일 광고가 TV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영상과 엄선된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 광고 속에서 아줌마란 젠더는 원더우먼의 아우라를 선보인다. 전업 주부가 분명한 하나의 직업이며, 그 안엔 희생과 부지런함, 타협하지 않는 용기와 가족을 지키려는 숭고한 가치까지 담겨 있음을 경쾌한 편집을 통해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어머니가 아줌마라는 세상의 경멸 섞인 편견의 호칭으로 불리던 시기를. 그리곤 이제 숙연해진다. 비록 TV광고처럼 멋진 유니폼과 강렬한 조명은 없었지만, 익명의 고독함 속에서도 결코 지치지 않고 굳건히 아줌마의 아우라를 지켜왔음을. 시청률이란 관심과 박수라는 갈채가 없었음에도 아줌마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음에 무한한 경외심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줌마들에게 이제 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같은 무게의 인사를 보내고 싶다. 강한 것은 여자가 아닌 아줌마라는 찬사를 듬뿍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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