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s Note] 사라진 것들과 사라지게 될 것들에 대하여
2026.02.20 11:09 광고계동향, 조회수:59

 사라진 것들과
사라지게 될 것들에 대하여

글 임태진 CD|제일기획


대한민국 직장인이고, 해가 바뀌었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있죠. 연말정산. 어쩌면 그렇게 할 때마다 새 로운 걸까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뭐 빠진 건 없나? 부양가족이니, 무슨 무슨 공제니, 온통 어려운 용어들뿐입 니다. 미루고 미루다 마감에 쫓겨서 막상 해보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끝이 납니다. 국세청 들어가서 인증하고, PDF 내려받아서 시스템에 입력하고, 빠진 정보만 입력하면 끝. “음? 이렇게 간단했었나?” 

사실 연말정산이 이렇게 쉬워진 게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카드, 보험 등본… 필요한 자료를 본인이 직접 전화해서 받고, 출력하고, 엑셀 파일 열어서 시뮬레이션 돌려보고... 뭐 난리였거든요. 거의 하 루 종일 했던 것 같아요. 클릭 몇 번으로 10분 안에 끝나는 연말정산 시스템을 보자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바 람직한 변화죠. 불필요한 작업은 싹 사라지고 편하고 정확하고 빠른 시스템이라니. 이런 불필요한 프로세스가 사 라지는 건 언제나 대환영입니다. 근데 또 막상 사라지면 아쉬운 것들도 분명히 존재하죠. 오늘은 그런 것들에 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사라져서 아쉬운 것들과 사라져서 좋은 것들.

먼저 사라져서 아쉬운 거. 뭐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제작이다 보니 처음 생각나는 건 요즘 보기 힘든 3M 스프레이랑 커터 칼, 대원보드 같은 겁니다. 제가 아트였던 시절엔 인쇄 작업이 정말 많았었거든요. 인쇄 시안 제 안하는 날이 되면 인쇄소에서 퀵으로 받은 지면 시안들을 사이즈에 맞춰 재단하고, 3M 스프레이를 뿌려서 폼 보 드에 붙이고, 커다란 보드 가방에 넣어야 끝이 납니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어요. 보드에 붙이다가 비뚤어져서 다시 출력하기도 하고, 보드 컷팅하다가 손을 베어서 피바다가 되기도 하고. 그땐 좀 번거롭 고 지겨웠었는데 그 과정에서 오던 즐거움 같은 게 살짝 그립기도 하네요. 1미터짜리 묵직한 스틸 자를 고정해 놓 고 한 번에 쫙 컷팅해서 성공했을 때의 희열. 대충 눈으로 가늠해서 한 번에 붙였는데 상하좌우 여백이 딱 맞아떨 어질 때 느끼는 쾌감. 그동안 고민하던 아이디어가 하나의 물리적인 결과물로 나와서 직접 눈으로 보던. 그 일련의 과정이 가끔은 그립기도 합니다.

아날로그 프로세스로 제작할 때도 그 시절만의 추억의 프로세스가 있었더랬죠. 필름 카메라로 지면 촬영 하던 시절에는 테스트 컷을 폴라로이드로 했었거든요. 중형 카메라에 폴라로이드 팩을 붙여서 대충 어떻게 나올지 한 장 뽑아보는 겁니다. 모델을 세우고, 조명을 맞추고, 모든 세팅이 끝나면 포토 실장님이 테스트 컷을 찍죠. 조명 이 터지고 지이잉~ 폴라로이드가 나오면 실장님이 필름을 쫙 뜯어서 팔랑팔랑 흔들면서 테이블로 걸어오시는 걸 보면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음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는군,” 이런 느낌이랄까? 촬영을 마치고 며칠 뒤에 밀착 보러 가서 루뻬로 컷을 고르기 전까지는 어떻게 찍혔는지 알 수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쪼그만 폴라로이드를 놓 고 옹기종기 모여서 이런저런 얘길 합니다. 포즈가 어떻고 앵글이 어떻고… 요즘처럼 촬영 중인 모든 컷을 모니터 로 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죠. 사진 촬영이 시작되면 대행사도 광고주도 포토 실장을 믿고 기다리는 일만 하면 되거든요.

영상 촬영 때 사라져서 아쉬운 건… 롤 체인지가 아닐까 싶어요. 필름 한 롤을 다 찍으면 롤 교체하는 시간 이 필요했었거든요. 조감독이 “롤 체인지 하겠습니다!” 외치고 나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잠깐 쉬러 갑니다. 그 러면 짬이 꽉 찬 촬영팀 퍼스트 형님이 남아서 ‘암백’(필름 갈 때 사용하는 Dark Bag)을 척척 착용하고 필름을 교 체합니다. 묵묵하고 능숙하게 일하는 모습이 나름 멋져 보였었죠. 슛 들어가면 피디님이랑 앉아서 6mm mini DV 레코더로 녹화하던 기억도 나고, 촬영이 끝나고 며칠 뒤에 인화를 마치면, NTC를 하고, 편집하고, DI도 하고… 지 금 생각해 보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 잠깐씩 기다리는 시간이 뭔가 여유도 있고 그랬던 것 같아요. 굳이 표현하자면 파인다이닝에서 전채요리와 메인디쉬 사이의 그런 호흡이랄까? 뭐 그런 느낌입니다. 아 너무 오래전 얘기인 거 같아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돌려보면 …
 
아날로그 제작 방식이 디지털로 넘어가고, 2007년쯤이 되면 인터랙티브 광고가 붐을 이룹니다. 아직 플 랫폼도 웹 표준화도 안 됐던 시절이라 오히려 좋았던 것 같아요. 캠페인마다 각각의 새로운 홈페이지를 만들어야 했 던 상황이라 정말 자유도가 높았었거든요. 지금은 여러 이유로 사라진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참 많이 썼던 것 같네요. 영상에서 못하는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 수 있었거든요. 전체 화면도 가능하고, 레이아웃도 자유롭고, 그야말로 “인터랙티브”한 크리에이티브를 만들 수 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웹도 전부 플랫폼화된 데다가 모바일로 넘어가면서 그 시절에 비하면 할 수 있는 게 너무 제한적이라 플랫폼 제약이 없이 자유스러웠던 그 시절이 그립긴 합니다.
 
그런데 과거를 돌이켜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두웠던 기억들도 같이 소환됩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범 죄에 가까웠던 폭언들. 비생산적이고 습관적인 야근과 체계적이지 못한 업무 프로세스. 그리고 강압적인 술자리 까지. 기억하기 싫은 일들도 많죠.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렇게 참고 있었나 의아해집니다. 그 시절은 정말 폭력의 시대였던 거 같아요.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와중에도 문득 생각나는 그 시절의 낭만? 같은 것도 있긴 합니다. 밤새 작업하고 새벽에 먹던 24시 복국이라던가, 경쟁피티 끝나고 기획, 제작, 프로 덕션까지 모두 모여서 하던 회식도 가끔은(아주 아주 가끔은) 그립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새겨보니 사라져서 아쉬운 시간은 모두 “기다리는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일종의 “뜸 들 이는 시간”이랄까요? 촬영 다 마치고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하면서 기다리는, 살짝 무료한 시간들. 그때는 하루라 도 빨리 보고 싶어서 안달 났었지만, 빠른 프로세스에 시달리는 요즘 돌이켜보면 그리운 그런 시간 들인 거 같아 요. 느린 프로세스의 그 시절엔 사전 준비할 때 훨씬 많이 고민했었고, 중간중간 여유 있을 때 되새김질하면서 꾸 준하게 디벨롭했던 거 같아요. 결과물에 대해서도 조금 더 진지했달까 뭐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디 방 한 쪽 벽에 한가득 붙어있던 A4 출력물들도, 새벽 3시쯤 졸고 있는 투디 실장님 깨워가며 작업했던 시간도,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나가면서 진행했던 느린 프로세스의 그 시절은 또 그 나름대로 의미 있던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었을 까 싶네요.

그럼, 앞으로 사라질 것들은 뭐가 있을까요? AI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걸 보면 어쩌면 실사 촬영 자 체가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슬퍼지네요. 촬영 없이 진행되는 제작이라니. 성우도 AI로 대체될 확 률이 높고, 인쇄 촬영은 이미 많이 줄어들었고… 예상컨대 작업하기 전에 미리 정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사라질 것 같아요. 일단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이후에 수정하고 보완하는 프로세스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의 프로세스에서 불합리하고 소모적인 일들은 줄여나 가고, 의미 있고 중요한 일들은 잘 남겨나가도록 노력하면서 지금의 프로세스에 충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괴 롭고 하기 싫은 일들도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리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 연말정산은 뺄게요. 하나도 안 그립습니다.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