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ly Yours 2013’은 지난호까지 수차례에 걸쳐 디지털화의 다양한 사례들을 이모저모 살펴본 바 있습니다. 1/2월호에서는 손편지나 메모 같은, 느림의 미학과 낭만을 디지털적으로 대신할 SNS의 미래에 대해 알아보았고, 3/4월호에서는 전화와 카메라의 설 자리를 빼앗아버린 스마트폰을 비롯해 시계·안경, 심지어 신발과 옷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온몸을 디지털 기술로 감싸고 있는 웨어러블 디바이스(Wearable Device)들, 그리고 다양한 인쇄매체들을 대신하며 디지털 기기의 경량화·휴대화를 더욱 부채질할 플렉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를 섭렵했습니다.
5/6월호에서는 TV프로그램 본방 사수를 위해 집으로 질주하던 기억과 명화극장의 시작을 기다리며 시그널에 두근거려했던 추억을 안드로메다쯤으로 보내버린 N스크린 기술 및 스마트미디어를 조명해 보았습니다. 지난 7/8월호에서는 ‘오늘은 열일 다 제치고 컴퓨터 없는 곳에서 놀아보자’던 낮술의 묘미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게 한 클라우드 기술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죠.
실로 우리는 지금 디지털 과잉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굳이 디지털화라거나 디지털시대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디지털은 이제 트렌드의 일종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삶 속에 더 깊숙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실제로 지금 인터넷의 바다를 조금만 둘러보면 USB메모리가 들어있는 넥타이, 디지털 저울로 무게가 표시되는 숟가락, 심지어 동영상까지 그대로 재현해낸다는 디지털 붓에 이르기까지, ‘아니 뭐 이런 걸 다 디지털화시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들이 디지털화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하나 더 알아보기보다는,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는 디지털 과잉시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와 디지털 과잉으로 인한 문제점들에 대해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디지털 치매 증후군 : ‘두뇌야, 너도 예전처럼 일 좀 해야지?’
장면 1 / 강촌이나 대성리 같은 곳에 MT라도 가면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친구들이 통기타 반주에 맞춰 가요를 합창하던 풍경은 이제 국립박물관 정도는 가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노래방 기기의 가사 기능이 없으면 후렴구 정도 외에는 노래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생긴 일입니다.
장면 2 /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걸려온 전화로 스마트폰에 불이 나더니, 화장실 가서 모두의마블 몇 판 하는데 스마트폰의 전원이 스르륵 나갑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회사 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 단축번호 1번이라는 기억 외에 전화번호의 단 한 숫자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라? 딸한테 전화해서 엄마 전화번호를 물어볼까’ 싶지만 그 역시 단축번호 2번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납니다.
위의 두 장면은 바로 ‘디지털 치매 증후군’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국립언어원의 정의에 따르면‘ 디지털 치매’란‘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발달에 힘입어 스스로의 뇌를 사용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게 된 현대인들의 기억력 감퇴현상’이라고 정의됩니다. 쉽게 말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뇌가 애써 기억하려는 노력 대신 그냥 노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우리 뇌는 외부로부터의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들인 후 몇 초에서 몇 분간 한시적으로 단기기억에 저장하고, 반복학습과정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장기기억으로 옮겨 저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뇌의 반복학습과정을 거치지 않고 디지털 기기인 스마트폰에 저장하다 보니 굳이 반복학습이 필요 없게 된 것이죠.
반복학습으로 장기기억이 되지 않으니 당연히 기억으로부터의 인출과정 역시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디지털 치매 증후군이 위협적이라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얻는 지식들이 내가 직접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기를 통한 간접정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 뇌의 장기기억은 책을 통한 암기과정에서 얻게 된 기억도 있지만, 직접 사용해보고 체험해 보는 과정에서의 경험지식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경험지식은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절차적 기술 같은 지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디지털기기를 통해 쉽게 얻은 정보는 경험지식이나 절차적 지식을 장기기억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결국 일상생활 속에서 직관을 이용한 복잡한 추론과정의 수행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일상생활 속에서 디지털 치매증후군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우리의 뇌를 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매일 일기를 쓴다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집중해서 읽는다거나, 메일주소나 짧은 문서는 직접 손으로 타이핑하거나, 자주 사용하는 전화번호는 단축키 대신 직접 기억해 누르는 등의 노력이 있겠습니다. 디지털 치매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종 편리한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줄이고, 직접 쓰고 읽고 기억하려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디지털의 독소를 몸 밖으로 뽑아내자 - ‘디지털 디톡스’
디지털 기기의 홍수 속에서 살다 보니 디지털로 인한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생겨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디지털 치매증후군’도 그 중 하나입니다만, ‘소진증후군’이라는 증세도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기기의 배터리 용량을 표시하는 눈금이 하나 이하로 남았거나 충전하라는 메시지가 뜰 때 마치 배터리가 다 소모되면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현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디지털로 인해 생긴 독소를 몸 밖으로 뽑아내자는 ‘디지털 디톡스’ 운동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디지털 디톡스는 디지털 기기가 생활필수품이 되고 사회문화의 중심에 서면서 각종 디지털 기기에 대한 중독성을 줄이고 심신을 회복시켜보자는 취지의 활동이나 관련 상품을 통칭해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최근 옥스퍼드 영어사전 온라인판에도 등재돼, 이 사회적 현상이 단순히 단기적 유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사회조류가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디지털 디톡스 운동은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2002년에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단체 리부트(Reboot)는 24시간동안 컴퓨터와 휴대폰을 쓰지 않겠다는 서약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마치 매년 3월중 1년에 하루 60분간 전원을 끄는 ‘지구시간(Earth Hour)’ 같은 느낌이랄까요? 리부트는 3월 23일을 ‘디지털 없는 국경일’로 만들어 ‘끊임없이 보내는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멈춰라.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내려고 시간을 보내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관둬라’ 등의 내용에 서약하도록 권고합니다. 저도 동참해 보고 싶은데, 광고주와 기획팀의 연락까지 완전히 끊고 과연 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네요.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의 칼럼니스트인 수잔 모샤트가 쓴 <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2012)>은 디지털 디톡스 운동의 10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따분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멀티태스킹을 하지 말라, 윌핑(검색 목적을 잊고 인터넷을 헤매는 것)을 하지 말라, 운전 중에는 문자를 하지 말라, 안식일에는 스크린 사용을 금하라, 침실은 미디어 금지구역으로 유지하라, 이웃의 업그레이드를 탐하지 말라, 계정은 비공개로 설정하라, 저녁식사 자리에 미디어를 가지고 오지 말라, 미디어에 저녁식사를 가져오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진정한 삶(Real Life)을 사랑하라’ 등입니다. 마치 성서의 10계명에서 착안한 듯한 디지털 디톡스 10계명은 시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우리나라에도 번역서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디지털 디톡스 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이 밤 12시 이후에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것도 디지털 디톡스의 필요성을 자각한 결과였지요. 대구·경북 지역 대학교수 30여 명으로 이루어진 시민단체인 다행복사회네트워크도 2011년부터 하루 1시간 스마트폰 끄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중앙일보, 2012년 5월 19일). 또한 지난해 말 50여 교사·학부모·시민 단체로 이루어진 아이건강국민연대가 청소년 스마트폰 문제의 심각성을 우려하며 SNS와 모바일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학부모가 셧다운시킬 수 있도록 하는, 가칭‘ 학생 스마트폰 중독 예방과 치유에 관한 법률’ 입법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도 디지털 디톡스 운동의 일환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 스스로가 디지털 기술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문제점을 자각하고 그 해소책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효과에서도 디지털 위험에 대한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인간사회는 자정능력을 갖고 있는 멋진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디지털 세상이 만든 상처, 디지털로 치유하다 - ‘디지털 힐링’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2만 달러로 아시아국가 중 5위, 전 세계 34위 수준입니다. 이에 반해 2012년 UN이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50개국 중 56위에 불과하고, OECD 국가 중 남성 돌연사 1위, 자살률 1위, 여성 우울증 1위, 흡연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정신적 피로도가 높은 사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것이 전적으로 디지털화 탓만은 아니겠지만, IT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이 디지털로 인해 갖게 된 상처의 단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디지털 세상이 가져다 준 상처를 디지털로 치유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러한 시도를, 가칭 ‘디지털 힐링’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디지털 힐링은 다양한 방법과 시도로 나타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자연의 소리나 음악 등을 감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휴식시간을 갖는 어플들이 이미 상당수 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스마트기기로 기분장애·학습장애·생활장애·노년장애 등을 치유하는 핵심 힐링 콘텐츠 개발의 민/관/산학 협약을 체결한 안양시의 예처럼 지자체들도 주민복지와 산업개발 차원에서 전문화된 힐링 콘텐츠 연구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디지털에 맞서는 아날로그, 그 생존의 해법 - 프리미엄화
디지털 시대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이제 시선을 개인에서 기업으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빠르고 손쉽게 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또 그만큼 빠른 속도로 소진돼 유행에서 멀어지는 디지털 제품들. 이에 맞서 전통적인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기업들이 살아남는 해법이 있었으니, 바로 ‘아날로그의 프리미엄화’입니다.
‘손으로 만든, 과거 방식의’ Bag
가방이나 보석 등 장신구와 같은 전형적인 아날로그 제품들은 원래 디지털의 특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아날로그화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손으로 만든, 과거 방식의’ 등과 같은 측면을 강조하는 프리미엄 아날로그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핸드백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명품 핸드백 중 하나인 샤넬 2.55백은 6명의 장인들이 10시간 이상 동안 180개의 공정을 거쳐 만들 정도로 대표적인 핸드메이드 제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샤넬의 대표 제품인 ‘클래식 캐비어 미디엄’ 백은 2008년 초 270만 원 수준에서 현재는 600만 원 이상으로 가격이 인상되며 매년 프리미엄화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샤넬’과 ‘재테크’의 합성어인 ‘샤테크’라는 신조어도 생겼네요. 물론 이를 단순히 여성들의 명품 선호현상의 일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업만이 아날로그적 방법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와 정서가 깃든 제품이 역설적으로 디지털 사회에서 더욱 큰 가치로 소비자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날로그시계와 라디오
전형적인 아날로그 제품군이었으나 대체제로 인해 디지털화되고 있는 제품군에서도 아날로그 제품들은 약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시계·책·라디오 등이 대표적인 제품입니다. 손목시계는 예전부터 핸드메이드 제품의 프리미엄화가 강하게 이루어진 제품입니다. 같은 시계 모델 내에서도 배터리를 사용하는 쿼츠(Quartz) 방식에 비해 태엽을 감아 사용하는, 더욱 불편하지만 더욱 아날로그적인 오토매틱(Automatic) 방식 모델이 두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리기도 합니다.
몽블랑의 사례가 재미있게 다가오는데요. 세계적인 필기구 회사 몽블랑은 자사 필기구에서 기능 위주의 제품 생산을 모두 중단하고 ‘권한·라이프스타일·성공’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변신해 디지털 시대의 영향을 최소화했습니다. 거기에 제품 다각화도 적극 추진해 1997년 수제시계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제품의 질도 역사도 경쟁사에 떨어져 한동안 고전했지만, 굴하지 않고 투자를 계속했지요. 그 렇게 전 과정을 자체생산하고 명품시계 브랜드도 인수한 결과, 이젠 시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타임라이터(Timewriter)’라는 슬로건으로 시계를 광의의 필기구로 포장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닌 자사의 아날로그시계를 만년필과 같은 명품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라디오는 어떤가요? 본래 라디오는 방송국에서 발신하는 전파를 잡아 이것을 다시 음성으로 복원하여 듣는 기계입니다. 하지만 최근 라디오 방송은 급격히 디지털화됐습니다. 스마트폰에서 어플리케이션만 작동시키면 언제 어디서나 잡음 없이 또렷한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플리케이션은 과거처럼 전파를 잡아 음성으로 복원하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아니라, 무선 인터넷망을 통해 라디오 방송 데이터 자체를 전송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가끔 인터넷의 끊김 현상에 의해 방송이 조금 불안정할 수는 있지만, 과거처럼 어떤 방송이 어떤 주파수에서 나오는지 기억해 주파수를 잡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라디오를 감상하는 행위 자체가 더욱 편리해진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리함보다는 아날로그 감성의 음원을 감상하는 것, 그리고 더 좋은 음질의 음원을 감상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공한 예가 바로‘ 티볼리 라디오(Tivoli Radio)’입니다.
원래 티볼리 라디오는 디자인에서부터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배어 있습니다. 액정이라든가 디지털적인 요소는 전부 배제돼 있고, 조작 기능도 단순해 오직 다이얼을 통해 주파수·전원·볼륨 세 가지만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한 기기에 너무 다양한 기능들이 포함되어 있는 요즘 기기들과는 달리 라디오라는 기능에만 충실합니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휴대폰에 사용하도록 개발된 최첨단 부품인 갈륨비소화금속(FET)를 세계 최초로 FM튜너에 사용하는 등 기술개발을 통해 최고 수준의 음질을 구현하기도 했습니다. 대표 모델인 모델원(Model One)의 경우 20만 원이 넘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종이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종이 없는 세상을 예측해왔지만, 종이 역시 의외로 건재합니다. 아직도 손글씨 메모나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저를 비롯해 다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사회의 선구자라고 하는 빌 게이츠 역시 디지털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한마디 날리셨습니다. “스크린을 읽는 것은 종이를 읽는 것보다 아직 불편한 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비싼 스크린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웹라이프스타일의 개척자라고 믿고 있는 나조차도, 읽을거리가 네다섯 쪽을 넘어가면 인쇄해서 가지고 다니며 읽고 주석도 달고 싶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의 종이에 대한 애착과 향수를 정확히 짚어낸 기업이 바로 몰스킨(Moleskine)입니다. 몰스킨은 요즘의 소비자들은 물건이 아닌 ‘경험’을 사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니즈를 해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만질 수 없고 감정적이며 지위나 정체성에 연관된 니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검은 표지와 하얀 속지가 있는 기본적인 형태의 몰스킨 수첩을, 단순 수첩이 아닌 ‘글자가 쓰이지 않는 책(Unwritten Book)’으로 포지셔닝했죠.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창조성을 적어내는, 쓰이지 않은 책으로 포지셔닝함으로써 이 제품을 사는 고객들에게‘ 창조적인, 남과 차별화된’이라는 가치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 결과 몰스킨은 일반 수첩 대비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2004년 이후 연30% 이상의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가 참 좋았지’ vs.‘ 세상 참 좋아졌다’
지금까지 여러 사례를 통해 보았듯 디지털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아날로그라는 개념은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예상됐지만, 결국 개인의 삶에서나 기업의 운영에서나 아날로그는 역설적으로 깊숙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디지털에 의존하고 빠져들 때 우리 사회에선 그에 대한 자정 및 반대급부로 아날로그를 향한 노력이 시도됐고, 대부분의 디지털 기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보다 쉽고 완벽한 아날로그의 재현’인 것입니다.
‘그때가 참 좋았지’,‘ 세상 참 좋아졌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디지털에 대한 예찬을 가장 잘 담은 두 마디, 당신은 어떤 말을 더 잘 쓰는 편인가요? 전자인 당신에게 디지털은 더 쉽고 편리하게 아날로그를 구현해 내는 기술을 계속 만들어 줄 것이며, 후자인 당신에게 아날로그는 갓 태어난 디지털을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보아온 듯한 친숙함으로 선사해 줄 것입니다. 훌륭하다고 칭찬해 마지않는 모 통신사의 슬로건처럼, 기술은 결국 사람을 향합니다.
진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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