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칸 국제 광고제’ 첫 참관을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메인 행사장인 ‘칸 팔레 드 페스티벌’ 앞에 섰던 그 날 이루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내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훌쩍 바뀌고 다시 찾은 칸은 여전했으며, 달려져 있었다.
푸른 바다, 끝내주는 날씨, 참관인 아이디 카드를 목에 걸고 열정적인 걸음으로 해변가와 팔레 곳곳을 누비는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이제는 더는 ‘광고제’라 불리지 않는 칸 라이언즈 그 자체였다.
2011년부터 ‘칸 국제 광고제(Cannes Internet Advertising Festival)’라는 이름 대신, ‘칸 라이언즈 인터네셔널 크리에이티비티 페스티벌(Cannes Lions International Festival of Creativity)’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칸 라이언즈는 듣던 것보다 더 많이 달라져 있었다.
TV 그랑프리 수상작이 페스티벌의 대미를 장식하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광고인들의 축제는 브랜드, SNS, 신기술, 예술과 문화, 정치와 사회운동 등의 다양한 분야가 ‘크리에이티브’라는 모토 하에 콜라보를 거듭하는 융합의 장이 되어있었다. 그들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팔레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소화하기엔 살짝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그때 그 시절 ‘2006년 칸 국제 광고제’에서는 만나기 힘들었을 ‘2017 칸 라이언즈의’ 수상작 3편을 골라보았다.
Google Home of the Whopper
요즘 국내에서도 광고가 한창인 음성인식 인공지능(AI) 스피커가 아이디어의 핵심이다(작은 램프모양의 스피커를 향해, 애칭(명령어)을 부르며 “날씨를 알려줘” “스파게티 레시피”라고 질문을 하면 스스로 서치를 해서 결과를 알려준다). 신선한 야채를 비롯한 각종 재료와 불에 직접 구운 패티까지, 주력 버거인 와퍼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버거킹은 미국의 대표적인 음성인식 인공지능 서비스인 ‘구글홈’을 이용했다. 버거킹 TVC 15초 광고가 끝나기 직전, 매장 점원이 나타나 ‘와퍼가 얼마나 훌륭한지 짧은 광고에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라며 “오케이 구글, 와퍼에 뭐가 들었지”라는 질문을 한다. 각 가정에 있는 구글홈 스피커는 TV 광고 속 모델이 말한 ‘오케이 구글’이라는 명령어에 반응해 작동을 시작하고, 위키피디아에 있는 와퍼의 모든 재료를 줄줄이 읽어준다. 구글홈의 인공지능이 실제 사람의 음성과 TV 속 은성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아이디어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싶다.
Underss 522
레바논 내 여성운동 조직 ‘Abaad’가 레바논 형법 522조에 대한 인식제고와 철폐를 위해 기획했다. 형법 522조는 ‘강간범이 강간을 저지른 후에도 피해자와 결혼을 하면 무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온라인과 TV로 형법 522조에 반대하는 드레스를 광고해 공론화시키며 온라인상 탄원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베이루트의 해변 공중에 31벌의 웨딩드레스를 걸어 전시했다. 종이로 제작된 이 웨딩드레스는 ‘올가미’에 걸려 교수형에 처한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드레스를 보고 멈추면, 탄원서 서명을 요청했다. 이 캠페인은 크리에이티브 자체보다는 수상 부문에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Glass’ 부문이란 ‘Glass ceiling(유리천장)’의 정신을 바탕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사회문화적 움직임을 담은 캠페인에 상을 수여하는 부문이다. 광고, 나아가 크리에이티브가 단순한 마케팅 도구의 역할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와 인식을 바꾸는데 앞장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이는 카테고리라는 생각이 든다.
Cheetos Museum
치토스는 이미 스낵 카테고리의 No.1이지만, 더 성장하기 위한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치토스를 구매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치토스의 주요 고객층인 8~12세의 어린이들은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즐긴다. 이러한 고객 인사이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미있는 모양을 한 치토스를 찾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특별한 모양을 한 것들을 골라내 온라인 전시회를 열었다. 이에 재미를 느낀 고객들은 스스로 특별한 모양의 치토스를 찾아내서 자신의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결국엔 치토스 뮤지엄(Cheetos Museum)이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다.
만약 SNS를 통한 일반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제조사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찍어냈을지도 모를 스낵을 가지고 전시회를 여는 시시한 아이디어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소비자가 발견하고 SNS를 통해 공유했다는 점에서 진정성과 화제성까지 확보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캠페인이 아닐까 싶다.
11년 전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연차가 쌓였고 직책을 맡았으며 그만큼 더 노련해졌다. 하지만, 2017년의 칸은 2006년의 칸보다 나를 더 긴장시켰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며, 학습의 욕구를 자극시켰다. 칸 라이언즈는,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더는 광고인의 축제가 아니며 발견과 융합이 넘쳐나는 크리에이티비티의 축제이다. 18년 차 광고인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조금은 아쉽고 서운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는 칸 라이언즈의 변화가 아닌, 업의 본질 자체의 변화인 것을. 한 사람의 광고인이 아닌 크리에이터로서 배우고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