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페이스북에서 좋아하는 페친이 쓴 흥미로운 글을 보았다.
‘이유 없이(혹은 이유 있게) 거슬리는 단어나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었다. 거기에는 백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왜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분위기에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분위기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투덜투덜한 리듬의 신명이 있는지. 나는 원글뿐 아니라 댓글들도 너무너무 신나게 읽었다. 싫어하는 마음이 유발하는 흥분이 전이되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싫어함의 다채로움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차별과 혐오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표현들 - 발암, 시집간다, 여자치곤, 병신같다 - 뿐 아니라 ‘사뭇’이나 ‘오롯이’처럼 아무 죄 없이 그저 느끼해서 미움을 받는 표현들도 있었다. ‘지긋지긋하다’라는 말이 너무 싫은데 왜냐하면 어감부터 이미 질리기 때문이라는 댓글과, 뛰는 놈도 나는 놈도 많은 세상인데 누가 ‘...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 그게 그렇게 듣기에 불만스럽다는 댓글을 읽으면서는 ‘와 정말 별걸 다 싫어해!’라고 생각하며 한참 소리 내 웃었다. 그런 다양한 댓글들 사이에 ‘~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듣기 싫다는 의견이 몇 개 끼어있었다.
‘~인 것 같아요’ 화법을 탐탁치 않아 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보았다. 우리 아빠도 그런 사람이다. 아빠는 나랑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마다 바보 같다고 혀를 찼다.
“저 사람 말하는 것 좀 봐라.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라니. 아니 자기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그것도 몰라?”
자기 감정에 대해서조차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고 좋은 것 같다, 맛있는 것 같다 쭈뼛거리기만 하는 이 말투에 대해서는 나도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 표현을 쓸 때마다 스스로 물렁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이 표현 없이 대화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말을 하다 말아버린다던가 (“저는 파란색이 더 좋은 것...”), ‘~인 것 같아요’를 안 쓰기 위해 ‘~인 듯해요.’ ‘~하지 않나 싶어요.’ ‘~라고 저는 생각하고(느끼고) 있습니다.’ 등등 온갖 완곡한 표현을 가져다가 용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나는 오늘날 이 말투에 제법 떳떳해졌다. 이 말이 쓰이는 많은 상황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시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문학 팟캐스트에서 그 시를 들었다.
영국의 대표 시인 중 한 명인 필립 라킨의 시 가운데 <침대에서의 대화>라는 시였다.
침대에서의 대화
침대에서의 대화는 가장 편안해야 하지
거기 함께 눕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의 일
두 사람이 정직하다는 것의 한 상징
그러나 시간은 점점 더 말없이 흐른다
바깥에서는 바람에 불완전한 불안이
하늘 여기저기에 구름을 짓고 흐트리고
캄캄한 마을은 지평선 위에 아무렇게나 쌓인다
그 중 어느 것도 우리를 보살피지 않지
그 무엇도 이유를 보여주지 않아
고립으로부터의 이 독특한 거리에서는
왜 찾기가 더 어려워지는지를 말이야
진실한 동시에 다정한 말을 혹은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말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가져온 신형철 평론가는 느리고 차분하게 이 시를 소리 내 읽었다. 으레 다른 부부들이 그렇게 하듯 하루가 저물어 잘 때가 되면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누곤 하는 시 속에 등장하는 부부는 ‘고립으로부터의 독특한 거리에서’ 점점 대화를 잃는다. 진실한 동시에 다정한 말을, 그리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말도.
신형철 평론가는 시의 마지막 두 연에 주목했다.
진실한 말과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 말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다정한 말과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말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이 세상에는 이런 이중부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 어떤 상태가 있다는 말을 하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예컨대 누군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당신은 정직함과 정확함이라는 미덕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런 이중부정의 형식으로밖에는 답할 수가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이 이중부정을 긍정으로 이해해도 되느냐고 재차 물어보면 당신은 ‘뭐, 그런 셈이죠.’ 라고 대꾸하고 말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어떤 거짓이 발생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서 마음이 스산해질지도 모릅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인 것 같다’는 말도 정직함과 정확함이라는 미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너무 빈번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빈번하게 애매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 죽겠으면서 자신이 먹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시간이 비는 주말 시간 뭐 하고 놀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보내기도 한다. 그동안 고대하던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당장 내가 어제 뭘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조차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분명 끔찍하게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놀랄 만큼 맛있는 것도 아닌 음식을 먹으면서 끼니를 넘기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한다. 뭔가 먹고 싶은 것 같아. 놀고 싶은 것 같아. 어제는 아무도 안 만난 것 같아. 기쁜 것 같아. 맛있는 것 같아...
좋으면 좋고 아니면 아닌 것 사이에서 우리는 더 많이 살아가고 있다. 그 애매모호한 지점을 우리는 그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애매모호함의 영역을 대체해주는 모든 표현이 새삼 소중하게 여겨진다. 뭔가, 왠지, 좀, 막, 그냥.......
그것은 인간 소통의 연골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만 같다. 뼈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말들이 중요한 세상이지만 그런 말들은 연골과 함께 비로소 굴곡하며 다른 뼈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이 가능해진다. 멀리까지 달려 나갈 수도 있고 말이다.
게다가 이 말들은 가끔 범상치 않은 힘을 보여주기도 하지 않는가?
이를테면 이런 말. “나 실은 너 좀 좋아해.”
이때 좀은 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