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ㅣCD 국내 제작그룹 auster.lee@cheil.com
나타샤는 밤의 무용수였다. 성남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며 돈을 모았다. 짓궂은 손님 때문에 눈물을 흘린 날들도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1년은 좋았다고 했다. 덕분에 2년 남은 대학을 마칠 수 있게 됐다며 에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덜컹거리는 차창 밖에는 푹푹 눈이 내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4인승 객실 안에는 이틀 동안 나와 나타샤뿐이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선이란 옛 시인이 나타샤를 사랑했었노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자기 엄마도 나타샤였고 할머니도 나타샤였다며, 혹시 그 시인이 자기 할머니를 사랑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 왜 온 거니?
톨스토이에게 묻고 싶은게 있어서.
뭔데 그게.
내가 광고를 계속 하는 게 밥값 버는 거 말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내를 별 말이 없었다. 대신 같이 술 먹던 선배가 "그 무슨 오버질이냐.. 차라리 나한테 물어라."
그의 말이 맞았다. 광고와 톨스토이는 관계가 없다. 그의 말이 틀렸다. 세상에는 오로지 내 안에서만 이어지는 두 꼭지점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선배에게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의미라는 건, 찾는 사람이 없으면 허깨비 같은 것 아니겠어요? 그게 민주주의의 의미든, 상품에 담는 의미든, 크고 작고를 떠나서, 그런 것이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유령 같은 것 아니겠어요? 선배의 목에서 갈라진 소리가 났다. 너, 그거 병이다, 병. 매사에 의미 찾는 거.
올 2009년 칸 국제광고제는 매사에 의미 찾는 환자들이 휩쓸었다, 라고 내 맘대로 정래했다. 물론 칸 광고제의 마지막 날 공식적인 뉴스레터를 통해 선언한 총평은, '디지털의 대세'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한 해였다...는 거지만, 공식은 공식이고 난 좀 다른 면을 봤다.
인쇄와 필름 같은 전통매체는 매체 자체의 진화가 멈춰 있으니 웰메이드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나머지 사이버, 티타늄, 아웃도어, PR등 이종결합과 진화를 거듭하는 매체들은 다른 방향으로 부챗살처럼 퍼져가고 있었다. 그 방향은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나 예술성 따위가 아니었다.
'그게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켰어?'
자신 있는 대답이 준비된 캠페인에 큰 상이 안겨졌다. 티타늄 대상을 받은 오바마 대선 캠페인이 그랬고, 사이버에서 대상을 받은 피아트의 에코 캠페인이 그랬고, 아웃도어 대상을 받은 밀리언달러 캠페인이 그랬다.
내 맘대로 결론은 이렇다.
칸에서는 이제 '나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 이렇게 기발하고 의미 있는 생각을 했어!'까지 가야 금상 이상을 준다.
2009년 칸의 3관왕, 호주 퀸즐랜즈 관광청의 'Best Job the World'캠페인도 그렇다. '섬 관리인을 뽑는 구인광고로 섬을 알리자!'는 아이디어의 뼈대 자체가 뭐 그리 기절할 만큼 기발한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기발한 것 이상이다. 그들이 미끼로 내세운 그 일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전 세계의 '문제 없던' 직장인들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같은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삶이 진짜가 맞는가? 하하.
프로모션 부문의 대상을 받은 유바리 시티 캠페인도 마찬가지라 봤다. 일본 최저 이혼률 도시라는 팩트에서 '돈이 없어도 사랑은 있는 유바리 마을', 이라는 의미를 끌어내고, 그 의미를 상품화해서 해피 커플들의 필수여행지로 바꿔저린, 파산 지경의 도시를 되살려낸 놀라운 작업이었다.
자꾸 이야기를 '의미'쪽으로 몰고 가는 이유는 이렇다. 광고하는 사람들끼리 술잔을 부딪치다 보면 어느 순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로 결론이 나버릴 때가 많다. 광고인이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 한 달 몇백만 원의 교환가치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면 슬프기도 하거니와 더 이상 세상의 큰 흐름과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제품이 가진 팩트에서 팩트 이상의 의미를 끌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가 하는 일에서는 팩트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앞으로 걸으라는 엄마게 꼴이 아닌가. 제대로 될 리 없다. 혹 몇 년 운 좋게 히트 광고를 만들더라도 오래 갈 리 없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의미 있는 광고, 삶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는 김에 좀 아프고 싶기도 하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감염되는 병, 의미라는 이름의 병에 된통 한 번 걸려서.